주일설교

2022년 6월 26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출25:8]

작성자 약속의교회 댓글 0건 조회 338회 작성일 22-06-27 20:18

바르트는 죄의 뿌리가 교만, 태만, 기만이라고 말했습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자리에 있으려는 죄이며, 태만은 하나님이 부르신 인간의 위치를 떠나는 죄이며, 기만은 자신을 속이며 거짓의 아비(요8:44)인 사탄의 종노릇 하는 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태만을 죄를 발견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라는 단어는 ‘함께 하지 않으려는 태만’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혼자 성소를 지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브살렐’ 혼자 한 것이 아니라 ‘오홀리압’과 함께 합니다.(출31:2, 31:6) 함께 동역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그것도 ‘태만’입니다. 다른 사람을 나처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려면 많은 시간과 희생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웃시야는 제사장들과 함께하려는 노력이 없었습니다.(대하26:21) 함께 하지 않는 태만의 죄로 격리되어, 별궁에서 홀로 외롭게 죽음을 맞이합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슈퍼스타 한 사람의 힘으로 세우지 않습니다. 혼자서만 열심히 하려는 모습을 태만이라는 ‘죄’로 규정합시다.
  ‘나를 위해’ 는 우리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태만을 나타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명확한 삶의 정체성은 자기를 위한 삶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삶’이라 말합니다. (사43:21) 하지만 나태한 우리는 주님을 위한 삶을 지속적으로 포기하고 나를 위한 삶을 살려고 합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범합니다.(삼하11:1-2) 백성들과 함께 전쟁에 나가야 할 왕의 정체성을 잃어버립니다. 자기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 사는 ‘태만’이 늦잠, 염탐, 불륜, 살인교사, 살인, 아들사망까지 이어진 겁니다. 태만으로서의 죄는 복음에 대한 거절인 동시에 거룩한 삶에 대한 거절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과 성령의 도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거룩한 삶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저급한 존재가 아니고 고상한 존재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일꾼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스스로 고상한 삶을 거부하고 저급한 존재로 살아가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아니하고 세상의 탐욕 속에 묻혀 사는 것 역시 태만으로서의 죄입니다. ‘나를 위해’ 라는 단어는 우리의 삶의 목적을 다시 바라보게 합니다.
  ‘짓되’ 는 움직이지 않는 우리의 태만을 드러냅니다. 주님은 우리의 손과 발로 당신이 거할 처소가 만들어지기 원했습니다. 전능하신 그분은 직접 성소를 만드실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연약하고 불안한 우리의 손과 헌신을 통해 성소가 지어지기 원했습니다. 인간과 끝까지 동역하려는 주님의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그리고 연약한 사람에게 반복적으로 위임하려는 주님의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짖되’는 말만하며 상상만 하며 생각만 하는 우리의 태만을 다시 드러나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주님은 먼저 그들에게 거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조건적인 거함에 반응하여 ‘그들이’, ‘나를 위해’, ‘짓되’를 실행하는 겁니다. 이기적인 마음으로 끝없이 혼자 일하려 하고, 지독하게 자신을 위해서만 살려고 하고, 말과 생각만 하고 손과 발은 움직이지 않고 무임승차하려는 나태한 나와 달리 주님은 참 부지런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의 정체성에서 도망치는 태만의 죄를 반복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님은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씀하십니다.(렘7:13) 신약에서 교회라는 영광의 정체성을 약속받았던 베드로도 태만으로 도망치지만 주님의 열심은 내 양을 먹이라고 반복합니다.(요21:17) 오늘도 주님의 열심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랑방 나눔 질문]
1.성전은 혼자 짓습니까? 성전은 누구를 위해 지어집니까? 성전은 누가 짓습니까?
2.무임승차 하려는 나태함을 마음이 있었는지 나누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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